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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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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는 1993년 일본 정부가 발표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 결과이다. 담화는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운영에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위안부들에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 이 담화는 이후 일본 역대 내각에서 계승되었으나, 일본 내 보수 세력의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2014년에는 담화의 작성 과정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의 협의가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 해결의 기준점이 되었으며, 한일 관계 및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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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개요
유형담화
발표일1993년 8월 4일
발표자고노 요헤이 (당시 내각관방장관)
주요 내용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및 사죄
배경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상 조사 결과 발표
내용
인정 사실위안소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
위안부 생활이 강제적이었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음
사죄 표명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함
향후 조치역사 연구 및 교육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알리고, 피해자 지원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
파장 및 영향
긍정적 평가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한 최초의 담화로 평가받음
비판적 평가법적 책임 인정 부족 및 배상 문제 미해결에 대한 비판
담화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 제기
논란 지속일본 내 우익 세력의 역사 수정주의 시도
한국 및 국제 사회와의 외교적 갈등 요인으로 작용
관련 정보
관련 인물고노 요헤이
관련 사건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문서아시아여성기금

2. 배경

고노 담화는 1993년 일본 제국 육군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위안부로 알려진 여성들을 군용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도록 강요했음을 발견한 정부 연구 결과 후 내각관방장관 고노 요헤이에 의해 발표된 성명이다. 일본 정부는 이때까지 여성들이 강요받았다는 것을 부정했다.

고노 담화에서 일본은 구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매춘소의 설치에 연관되었다고 인정했다. 위안부는 주로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의 감언, 강제 등에 의해 그리고 때때로 관리나 군인을 통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되었고, 위안소의 강압적인 환경 아래 비참하게 살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징집이 주로 민간 모집 업체에 의해 시행됐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성명에서 강요가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직접 여성들의 모집과 유지에 사용된 것을 인정했는지 아닌지는 아직 논의되고 있다.

고노는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1992년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한국의 태평양 전쟁 유족회에서 소개된 16명의 위안부를 면담 조사[27][28]를 실시하여,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발표 당시 고노는 "조사한 결과를 담담하게 정리했다"라고 기자 회견에서 말했지만, 2014년 6월 20일에 일본 정부에 의해 공개된 검증 결과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고노 담화 작성 과정 등에 관한 검토 팀)에서, 사전에 '''한국 정부와의 사이에 면밀한 문구 조정이 있었다'''는 것과, '''위안부 증언의 뒷받침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30][31] 발각되었다. 또한, 한국 측과의 문구 조정이 있었다는 것은 '''한일 양국에서 비공개'''로 처리되었다.[31] 산케이 신문은 증거 자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빙성이 낮은 증언에 의해 담화가 작성된 경위로 볼 때, 고노 담화는 사실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29]

고노의 역사 연구 및 교육 촉구는 이 문제를 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는 기반이 되었으며,[4] 전쟁 중 강제로 성매매를 강요당한 여성들에게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의 설립으로 이어졌다.[5]

2. 1.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의 담화 (1992)

고노 요헤이의 전임자인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은 1992년 7월 6일 "한반도 출신자의 소위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가토 내각 관방장관 발표"를 발표했다.[23] 가토 고이치는 이 발표에서 "정부는 위안소 설립, 위안부 모집 관리, 위안소 건설 및 강화, 위안소 관리 및 감시에 관여했다 [...]"고 밝히고, "소위 '전시 위안부'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유감을 표명"한다고 말했다.[3]

당시 위안부 문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이 위안부가 강제 연행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24][25] 일본 정부는 강제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대응에 고심하는 상태였다.[26]

3. 고노 담화의 내용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당시 내각관방장관이 발표한 고노 담화는 일본 제국 육군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하고 운영했음을 인정하고 사죄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노 담화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이 있었으며, 위안소 생활이 참혹했음을 인정했다. 또한,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하고,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고노 담화는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담화[59]1995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후 역대 일본 총리들도 한국에 대해 사죄를 표명해 왔다.

3. 1.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 인정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되어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58]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감언이설, 강압 등에 의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명확하게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 참혹한 것이었다.[59]

이른바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는데,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되어 발표하기로 했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되었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지만, 그 경우에도 감언이설, 강압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다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에서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고노 요헤이 담화일본어

3. 2.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 인정

1993년 일본 제국 육군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위안부로 알려진 여성들을 군용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도록 강요했음을 인정한 정부 연구 결과 발표 후, 내각관방장관 고노 요헤이는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17]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담당했지만, 감언이설이나 강압 등 본인 의사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고, "관헌"이 직접 가담한 사실도 명확히 밝혀졌다고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강제성 인정에도 불구하고, 담화 발표 당시 "보상은 불필요"라고 했던 한국 측은 이후 전 위안부가 제기하는 배상 소송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61] 현재는 국회의원이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3. 3. 위안소 생활의 참혹함 인정

고노 담화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기간, 또한 광범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었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위안소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는 구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감언이설, 강압 등 본인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고, 관헌 등이 직접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에서 참혹한 것이었다.[58]

3. 4. 사과와 반성 표명

고노 담화에서 일본 정부는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58]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하고, 역사 연구 및 교육을 통해 오랫동안 기억하며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했다.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총리대신은 '평화 우호 교류 계획'에 관한 담화에서 "이른바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했다.[60] 1995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 발족되어 전 위안부에 대한 보상 사업을 진행했으며, 이후 역대 일본 총리들도 한국에 대해 사죄를 표명해 왔다.[61]

3. 5. 역사 교육 강조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역사 연구와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며,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금 표명한다.[58]

4. 고노 담화 발표 과정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당시 내각관방장관은 일본 제국 육군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위안부로 알려진 여성들을 군용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도록 강요했음을 인정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전까지 여성들이 강요받았다는 것을 부정해왔다.

고노 담화에서 일본은 구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매춘소 설치에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위안부 모집은 주로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감언이설, 강압 등으로 여성들을 본인 의사에 반하게 하였고, 때로는 관리나 군인이 직접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다. 위안소 생활은 강압적인 환경 속에서 비참했다고 발표했다. 다만, 징집이 주로 민간 모집 업체에 의해 시행됐다고 알려져, 일본군이 직접 여성들의 모집과 유지에 강제력을 사용했는지 여부는 논란이 되고 있다.[22]

담화 발표에 앞서 1992년 7월 6일, 미야자와 내각의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은 "한반도 출신자의 소위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가토 내각 관방장관 발표"를 통해 위안소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추가 조사를 약속했다.[23]

담화 원안은 당시 내각 외정 심의실장인 타니노 사쿠타로가 작성했다.[21] 고노는 기자 회견에서 "조사한 결과를 담담하게 정리했다"고 말했지만, 2014년 6월 20일 일본 정부가 공개한 검증 보고서에 따르면, 사전에 한국 정부와 면밀한 문구 조정이 있었고, 위안부 증언에 대한 뒷받침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30][31] 한국 측과의 문구 조정은 양국에서 비공개로 처리되었다.[31]

고노 담화 문구는 다음과 같이 한일 간 조정되었다.[88]

한일 간 고노 담화 문구 조정
쟁점일본 측 제안한국 측 요구최종 문구
위안소 설치에 관한 군의 관여군 당국의 "의향"군 당국의 "지시"군 당국의 "요청"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대부분의 경우"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대부분의 경우" 삭제(삭제 반대)
사과와 반성"사과""반성" 추가"사과와 반성"



2013년 10월 16일산케이 신문은 전 위안부 16명의 청취 조사 보고서를 입수하여 분석한 결과, 증언의 사실 관계가 모호하고 다른 발언과 불일치하는 부분이 많으며, 역사 자료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보도했다.[43] 2013년 12월 2일자 석간 후지는 고노 자신이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뒷받침하는 "종이 증거가 없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44][45]

2014년 2월 20일, 담화 발표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중원예산위원회에서 "미국도서관까지 가서 조사했지만,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모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데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48]

같은 해 6월 20일에,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해, 단키 게이이치, 아키즈키 히로코, 아리마 마키코, 고노 마리코, 하타 이쿠히코의 5명으로 구성된 검토 팀의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경위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52]

4. 1. 한국 정부의 진상 규명 요구

1992년(헤이세이 4년)7월,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은 위안소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 조사를 약속했다."[23] 그 3주 후에, 김영삼 대통령은 "모집을 포함하여 강제가 있었다"라고 발표했다.[32]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물질적인 보상은 요구하지 않는 방침이다"라고 명언했다.[33]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 정부는 ... 금전적 지원은 독자적으로 할 것이므로 일본은 강제 연행을 인정하면 된다는 자세가 선명해졌다", "정부는 강제 연행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는 사태의 타개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라고 적었지만[34], 고노 요헤이는 "밀약"을 부정하고 있다.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을 맡고 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문서로 강제를 입증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라면서도 "분명히 그녀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진실을 말했다"고 하여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가 있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떤 의미에서도 일본 정부의 지휘 명령 계통 아래 강제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36]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은 위안부가 강제 연행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이에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24][25] 일본 정부는 강제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대응에 고심하는 상태였다.[26]

고노는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1993년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한국의 태평양 전쟁 유족회에서 소개된 16명의 위안부를 면담 조사[27][28]를 실시하여,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의 발표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가 실시한 고노 담화 작성 과정 검증에서도, 한국 측의 문언 조정 요구에 대해 내각 외정 심의실과 외무성이 협의하면서 "그때까지 실시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사실 관계를 왜곡하는 일이 없는 범위에서, 한국 정부의 의향·요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부"하고 있으며, 한국 측에 요구된 "군의 지시" 등의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37]

산케이 신문은 증거 자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빙성이 낮은 증언에 의해 담화가 작성된 경위로 볼 때, 고노 담화는 사실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29]

4. 2. 일본 정부의 조사

1992년(헤이세이 4년)7월 6일, 미야자와 내각의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은 "한반도 출신자의 소위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가토 내각 관방장관 발표"를 발표했다.[23] 당시 위안부 문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이 주장하는 위안부 강제 연행 주장에 대해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24][25]했고, 일본 정부는 강제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대응에 고심하는 상태였다.[26]

고노 요헤이는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한국의 태평양 전쟁 유족회에서 소개된 16명의 위안부를 면담 조사했다.[27][28] 산케이 신문은 증거 자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빙성이 낮은 증언에 의해 담화가 작성된 경위로 볼 때, 고노 담화는 사실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29]

2014년(헤이세이 26년)6월 20일에 일본 정부에 의해 공개된 검증 결과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고노 담화 작성 과정 등에 관한 검토 팀)에서는, 사전에 한국 정부와의 사이에 면밀한 문구 조정이 있었다는 것과, 위안부 증언의 뒷받침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30][31] 밝혀졌다. 또한, 한국 측과의 문구 조정이 있었다는 것은 한일 양국에서 비공개로 처리되었다.[31]

1992년 7월, 가토 고이치는 위안소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 조사를 약속했다."[32]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물질적인 보상은 요구하지 않는 방침이다"라고 명언했다.[33]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 정부는 ... 금전적 지원은 독자적으로 할 것이므로 일본은 강제 연행을 인정하면 된다는 자세가 선명해졌다", "정부는 강제 연행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는 사태의 타개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라고 적고 있지만,[34] 고노 요헤이는 "밀약"을 부정하고 있다.[35]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을 맡고 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문서로 강제를 입증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분명히 그녀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진실을 말했다"고 하여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가 있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떤 의미에서도 일본 정부의 지휘 명령 계통 아래 강제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36]

일본 정부가 실시한 조사에서는 "일본군이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행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공문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34] 고노는 "조직으로서 강제 연행을 하고 있어도, 억지로라도 데려오라는 명령서나 억지로 데려왔다는 보고서는 작성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보이며, 강제를 인정한 근거로서 "모집·이송·관리 등의 과정 전체를 보고, 자유 행동의 제한이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40]

일본 정책 연구 센터에 따르면, 고노는 담화 발표 후 기자 클럽에서의 설명에서 "관헌 등이 직접 여기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것은 하쿠바 사건을 가리키고 있으며, 하쿠바 사건 이외에는 관헌 등이 직접 여기에 가담한 사실은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실시된 한국인 전 위안부와의 청취 조사에서는, 위안부의 증언을 기록했을 뿐, 사실 관계의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1] 청취 자료는 현재도 비공개이다.[41]

한국에서는 안병직서울대학교 교수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전 위안부로 지적되고 있는 여성들에게 청취 조사를 실시하여 "증언자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케이스(는) 조사를 중단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전 위안부 증언의 절반을 기각하고 있다.[41] 더욱이 일부 위안부를 제외하고 전 위안부가 강제 연행되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41] 또한, 전 위안부의 증언에는 위안소가 아니라, 민간의 매춘 시설이 있던 도야마현부산에 연행되었다고 하는 것도 있다.[41][42]

2013년 10월 16일산케이 신문은, 전 위안부 16명의 청취 조사 보고서를 입수한 결과, 증언의 사실 관계는 모호하고 다른 기회에서의 발언과의 불일치도 눈에 띄는 외에, 성명이나 출생년도조차 부정확한 예도 있어, 역사 자료로서는 통용되지 않는 내용이었다고 보도했다.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 연행을 나타내는 정부 자료는 일절 발견되지 않고, 결정적인 전 위안부에 대한 청취 조사도 엉성했던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고노 담화의 정당성은 근본에서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3]

2013년 12월 2일자 석간 후지는, 고노 자신이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강제 연행)을 뒷받침하는 "종이 증거가 없다"라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44][45]

산케이 신문2014년 1월 1일자, "고노 담화의 기만성 더욱, 사실상의 한일 '합작' 증언"이라는 기사에서, 근거가 된 한국에서의 전 위안부 16명에 대한 청취 조사도 극히 엉성했을 뿐 아니라, "담화의 문안에까지 한국 측이 직접 관여한 사실상의 한일 합작이었던 것이 밝혀져, 담화의 기만성은 이제 숨길 수 없게 되었다."라고 보도했다.[46] 같은 해 1월 8일자 기사에서는, "한국 측은 고노 담화나 조사 결과 보고서 작성에 크게 개입해 놓고, 그 후에는 담화의 취지를 확대 해석하여 이용하며, 세계에서 일본 비난의 재료로 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47]

같은 해 2월 20일, 담화 발표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을 맡고 있던 이시하라 노부오가 중원예산위원회에서 "미국도서관까지 가서 조사했지만,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모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데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48]

같은 해 5월 2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도내에서 강연하여, "전 위안부의 증언을 전부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별개로, (위안부 모집의 강제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상정할 수 있다. 사실은 없다거나 기록은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을 기록에 남길 리가 없다."라고 말하며, 고노 담화의 검증을 실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51]

같은 해 6월 20일에,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해, 단키 게이이치, 아키즈키 히로코, 아리마 마키코, 고노 마리코, 하타 이쿠히코의 5명으로 구성된 검토 팀의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경위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52]

2014년 2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담화의 근거가 된 전 위안부의 증언 내용을 검증할 의향을 보였고,[79] 같은 해 4월, 정부는 유식자들에 의한 검증팀을 설치해, 같은 해 6월 22일까지 검증 결과를 정리했다고 했다.[80]

일본 정부는 2014년 6월 20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부터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 보고서에는 담화 작성 시 한일 양국 간에 문구를 조정한 경위가 명기되었고, 전 위안부 증언에 관한 뒷받침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82] 하지만, 실제 보고서에서는 면담 조사는 일본 정부의 진지한 자세를 보이기 위해 실시되었고, 실제로는 면담 조사가 실시되기 전부터 관계 성청이나 미국 국립 공문서관에서의 관련 문서 조사, 군 관계자나 위안소 경영자 등의 증언과 면담 조사, 정대협의 증언집 분석 등 일련의 조사를 통해 이미 결과가 결정되었고, 담화의 원안은 면담 조사가 종료되기 전에 작성되었다고 보고되었다.[52]

4. 3. 한일 간 협의

고노 담화는 발표되기 전, 한국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쳤다. 특히 담화 내용의 핵심 쟁점이었던 '강제성' 표현을 두고 양국 간에 치열한 문구 조정이 이루어졌다.[17]

한국 정부는 담화에 '강제성'이 명확히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은 "일본 측의 발표가 '일부 사례에서 강제성의 관여가 있었다'와 같은 모호한 표현에 의존한다면 격분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17] 반면, 일본 정부는 '강제성'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이시하라 노부오 부관방장관은 "모든 위안부가 '강제성'으로 모집되었다고 무조건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17]

일본은 "양국 국민의 마음에 지속적인 불안감을 주지 않으면서 일본 정부의 인식을 최대한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모색했다.[17] "'강제성'의 관여 문제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얻는 것은 어렵지만",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강제성의 일부 요소도 존재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는 "어쩌면 '강제성'의 일부 요소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밝힘으로써 어느 정도의 인식을 보여주는 양보를 했다.[17]

양측은 세 가지 주요 쟁점에 대해 구체적인 문구 조정을 했다.[17]

한일 간 고노 담화 문구 조정[88]
쟁점일본 측 제안한국 측 요구최종 문구
위안소 설치에 관한 군의 관여군 당국의 "의향"군 당국의 "지시"군 당국의 "요청"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대부분의 경우"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대부분의 경우" 삭제(삭제 반대)
사과와 반성"사과""반성" 추가"사과와 반성"


  • "대부분의 경우": 일본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되었다..."라는 문구를 제안했다. 대한민국은 "대부분의 경우"라는 구절을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모든 경우에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거부했다.[17]
  • "의도" 또는 "지시": 일본은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의도''에 따라 운영되었다."라는 문구를 제안했다. 대한민국은 이 표현을 "지시"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군이 위안소 설립을 "지시"했음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신 "요청"이라는 표현을 제안했다. 그 결과 문장은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운영되었다."가 되었다.[17]
  • "사과"와 "반성": 일본은 "일본 정부는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를 표명하고자 합니다..."라는 문구를 제안했다. 대한민국은 이 "사과" 표현에 "반성"을 추가할 것을 요청했고, 일본은 이에 동의했다. 그 결과 문장은 "일본 정부는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을 표명하고자 합니다..."가 되었다.[17]


이러한 문구 조정은 양국 정부에 의해 비공개로 처리되었다.[31] 2014년 일본 정부의 검증 결과 보고서에서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고노 담화가 단순한 사실 확인을 넘어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29]

5. 고노 담화에 대한 비판과 논란

고노 담화는 발표 이후 일본 국내외에서 다양한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2007년 첫 번째 임기 동안, 여성들이 군 위안소에 종사하도록 강요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발언했다.[10] 고노 담화 초안 작성 당시 내각관방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일본 국회에 증언에서 조사 과정 동안 인터뷰한 여성 16명의 진술을 증명하는 어떤 문서 기록도 발견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11]

집권당 자민당 의원들은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이 2014년 2월 20일에 열린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보고서의 "배경"을 재검토하기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다고 발표했을 때, 담화 수정을 조사하면서 아베가 주도하는 정부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었다.[14] 2014년 검토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비판받았다.[15]

2014년 6월 20일, 하타 이쿠히코 등 4명은 의회 제출을 위해 고노 담화와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교류의 세부 사항 - 고노 담화 초안부터 아시아여성기금까지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검토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일본 정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있었다"라고 말했으며, 대한민국은 정식 항의를 제기하기 위해 일본 대사를 소환했다.

1992년 7월,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은 위안소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 조사를 약속했다."[32] 3주 후,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집을 포함하여 강제가 있었다"라고 발표했다.[32]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물질적인 보상은 요구하지 않는 방침이다"라고 명확히 밝혔다.[33]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 정부는 ... 금전적 지원은 독자적으로 할 것이므로 일본은 강제 연행을 인정하면 된다는 자세가 선명해졌다", "정부는 강제 연행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는 사태 타개가 곤란하다고 판단했다"라고 보도했지만,[34] 고노 요헤이는 "밀약"을 부정했다.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문서로 강제를 입증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라면서도 "분명히 그녀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진실을 말했다",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가 있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떤 의미에서도 일본 정부의 지휘 명령 계통 아래 강제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36]

일본 정부 조사에서는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했다"라는 공문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34] 고노는 "조직으로서 강제 연행을 하고 있어도, 억지로라도 데려오라는 명령서나 억지로 데려왔다는 보고서는 작성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보이며, 강제를 인정한 근거로 "모집·이송·관리 등의 과정 전체를 보고, 자유 행동의 제한이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40]

2013년 12월 2일, 석간 후지는 고노 자신이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강제 연행)을 뒷받침하는 "종이 증거가 없다"라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44][45]

산케이 신문2014년 1월 1일 자 "고노 담화의 기만성 더욱, 사실상의 한일 '합작' 증언"이라는 기사에서, 근거가 된 한국에서의 전 위안부 16명에 대한 청취 조사가 매우 엉성했을 뿐 아니라, "담화 문안에까지 한국 측이 직접 관여한 사실상의 한일 합작이었던 것이 밝혀져, 담화의 기만성은 이제 숨길 수 없게 되었다"라고 보도했다.[46]

같은 해 5월 2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도내에서 강연하며 "전 위안부의 증언을 전부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별개로, (위안부 모집의 강제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상정할 수 있다. 사실은 없다거나 기록은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을 기록에 남길 리가 없다"라고 말하며, 고노 담화 검증을 실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51]

같은 해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해 5명으로 구성된 검토 팀의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경위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52]

일본 정부는 2014년 6월 20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부터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

이케다 노부오는 2007년 5월 1일, 자신의 블로그에서 "고노 담화의 근거가 된 것은... '나의 전쟁 범죄'(三一書房)라는 책이지만, 이 내용은 날조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라고 언급했다.[93]

요시다 세이지의 고백은 하타 이쿠히코가 시행한 연구에서 그 기술에 대한 불일치를 지적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되었다.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의 거짓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과거 기사의 오류를 인정했다. 자민당은 잘못된 보도가 위안부 문제를 과장했으며 일본의 국가적 이미지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5. 1. 일본 보수 세력의 비판

고노 담화는 일본 내 일부 보수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8] 이들은 주로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에 강제성을 띄지 않았다는 점과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07년 총리 재임 시절, 일본군이 위안부로 일할 여성을 강제로 동원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발언했다.[10] 고노 담화 초안 작성 당시 내각 부관방 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일본 국회에서 조사 과정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던 16명의 여성들의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서면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11]

자유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아베 총리가 이끄는 정부가 담화 개정을 검토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왔으며,[8] 스가 요시히데 관방 장관은 2014년 2월 20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보고서의 "배경"을 재검토하기 위한 팀이 구성되었다고 발표했다.[14]

2014년 6월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검증 결과를 발표하면서, 담화 작성 과정에 한국 정부와의 협의가 있었고 당시 이 협의를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52]

이러한 비판의 연장선에서, 일본의 우익 시민 단체 "[http://kounodanwa.com/index.html 고노 담화의 완전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의 모임]"은 위안부가 허위이며, 고노 담화가 굴욕적인 내용이므로 이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7년 7월 5일, 주일 미국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연 이들은 7,000명 이상의 서명이 쓰인 탄원서를 아베 신조 총리에게 제출했으며, 7월 8일에는 긴자에서 데모 행진을 열었다.[94]

5. 2. 요시다 세이지 증언 논란

요시다 세이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본 제국군이 제주도에서 많은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 연행했다고 증언했다.[93] 그러나 이 증언은 사실과 다르다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과거 기사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정정 보도를 냈다. 자민당은 이러한 잘못된 보도가 위안부 문제를 과장하고 일본의 국가적 이미지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5. 3. 한국의 반응

1993년 3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 물질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 예산으로 배상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강제 연행을 인정하면 금전적 지원은 독자적으로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17][34]

2014년 아베 신조 총리가 담화 검증을 표명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항의했다. 이후 아베 총리는 검증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한국 정부는 이를 평가했다.[78]

2014년 6월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검증 결과를 발표하며 문안 작성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협의가 있었고, 당시 이 협의를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82] 외교통상부는 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8]

5. 4. 기타 국가 및 국제사회의 반응

이 문서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별개로, 국제사회와 기타 국가들의 반응, 특히 미국의 반응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2014년 2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고노 담화의 근거가 된 전 위안부의 증언 내용을 검증할 의향을 보였고,[79] 같은 해 4월, 일본 정부는 유식자들로 구성된 검증팀을 설치해 6월 22일까지 검증 결과를 정리했다.[80]

같은 해 2월 20일, 담화 발표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을 맡았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중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도서관까지 가서 조사했지만,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모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데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48]

2014년 3월 14일, 일본 공산당의 시이 카즈오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고노 담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역사의 위조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과 성적 폭행의 피해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고노 담화는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자세를 고치고, 진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1]

6. 고노 담화 검증 논란 (2014)

2014년 아베 신조 정권은 고노 담화 검증을 실시하여 국내외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자민당 의원들은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이 2014년 2월 20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담화의 배경을 재검토하기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고 발표하면서 담화 수정 가능성을 논의했다.[79] 이와 관련하여 2014년 6월 20일, 하타 이쿠히코 등 5명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교류의 세부 사항 - 고노 담화 초안부터 아시아여성기금까지 -''라는 보고서를 검토하여 국회에 제출했다.[17] 이 보고서는 요시다 세이지의 고백에 나타난 불일치를 지적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같은 날,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부터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발표했다.[52] 교도 통신은 보고서에 담화 작성 시 한일 양국 간 문구 조정 경위와 전 위안부 증언에 대한 뒷받침 조사가 없었다는 내용이 명기되었다고 보도했다.[82] 그러나 실제 보고서에는 면담 조사가 일본 정부의 진지한 자세를 보이기 위해 실시되었고, 실제로는 면담 조사 이전에 관계 성청, 미국 국립 공문서관 관련 문서 조사, 군 관계자나 위안소 경영자 등 증언과 면담 조사, 정대협 증언집 분석 등 조사를 통해 이미 결과가 결정되었고, 담화 원안은 면담 조사 종료 전에 작성되었다고 보고되었다.[52]

2014년 검토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비판받았다.[79]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대변인 화춘잉은 "일본 정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있었다"고 말했으며, 한국은 정식 항의를 위해 일본 대사를 소환했다.

아사히 신문은 강제적인 성 노예가 인신매매 형태로 존재했다는 핵심 사실은 유효하며, 거짓 증언 확인으로 오해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아베 총리 또한 고노 담화를 수정할 계획이 없다고 재확인했다.

6. 1. 검증 배경

제1차 아베 내각은 고노 담화 재조사 의향을 표명했으나, 2012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자민당 공약에는 관련 내용이 없었다. 아베 총리 취임 후 2013년 5월,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담화 재검토를 부정했고,[76] 2014년 3월 14일 아베 총리도 재검토하지 않겠다고 밝혔다.[78]

2014년 2월, 스가 관방장관은 전 위안부 증언 내용 검증 의향을 보였고,[79] 같은 해 4월 정부는 검증팀을 설치, 6월 22일까지 결과를 정리했다.[80] 2014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부터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발표, 교도 통신은 담화 작성 시 한일 간 문구 조정 경위, 전 위안부 증언에 대한 뒷받침 조사 미실시 등이 보고서에 명기되었다고 보도했다.[82]

6. 2. 검증 과정

1992년 7월, 가토 고이치 당시 내각관방장관은 위안소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추가 조사를 약속했다.[32] 3주 후, 김영삼 대통령은 "모집을 포함하여 강제가 있었다"라고 발표했다.[32]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물질적인 보상은 요구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33]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 정부는 ... 금전적 지원은 독자적으로 할 것이므로 일본은 강제 연행을 인정하면 된다는 자세였다", "정부는 강제 연행을 인정하지 않고는 사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라고 보도했지만,[34] 고노 요헤이는 "밀약은 없었다"라고 반박했다.[35]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문서로 강제를 입증하는 것은 없었다"라면서도 "분명히 그녀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진실을 말했다"고 하며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가 있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떤 의미에서도 일본 정부의 지휘 명령 계통 아래 강제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36]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 작성 과정 검증에서도, 한국 측의 문구 수정 요구에 대해 내각 외정심의실과 외무성이 협의하여 "지금까지 실시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사실 관계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한국 정부의 의향·요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부"했으며, 한국 측이 요구한 "군의 지시" 등의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37] 산케이 신문 기자 아비루 루이는 "세계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제 연행을 인정했다고 오해하게 되어 기정사실화되었다"[38], "사실 판단이 아니라 정치 판단이었다"라고 비판했다.[39]

일본 정부 조사에서는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했다"는 공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34] 고노는 "조직적으로 강제 연행을 했더라도, 억지로라도 데려오라는 명령서나 억지로 데려왔다는 보고서는 작성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보이며, 강제를 인정한 근거로 "모집·이송·관리 등의 과정 전체를 보고, 자유 행동의 제한이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40] 일본 정책 연구 센터에 따르면, 고노는 담화 발표 후 기자 클럽 설명에서 "'관헌 등이 직접 여기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것은 하쿠바 사건을 가리키며, 하쿠바 사건 외에는 관헌 등이 직접 가담한 사실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동시에 실시된 한국인 전 위안부 청취 조사에서는 위안부 증언을 기록했을 뿐, 사실 관계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1] 청취 자료는 현재도 비공개이다.[41]

한국에서는 안병직 서울대학교 교수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전 위안부로 지목된 여성들에게 청취 조사를 실시, "증언자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다고 느껴지는 경우 조사를 중단한다"는 원칙에 따라 전 위안부 증언의 절반을 기각했다.[41] 일부 위안부를 제외하고 전 위안부가 강제 연행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41] 또한, 전 위안부 증언에는 위안소가 아닌 민간 매춘 시설이 있던 도야마현부산에 연행되었다는 내용도 있다.[41][42]

2013년 10월 16일 자 산케이 신문은 "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의 근거가 된, 한국에서의 전 위안부 16명 청취 조사 보고서를 입수했다. 증언의 사실 관계는 모호하고 다른 기회에서의 발언과 불일치도 눈에 띄며, 성명이나 출생년도조차 부정확한 예도 있어 역사 자료로 통용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 연행을 나타내는 정부 자료는 일절 발견되지 않았고, 결정적인 전 위안부 청취 조사도 엉성했던 것으로 밝혀져 고노 담화의 정당성은 근본에서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전 위안부 보고서 자체가 엉성한 조사가 두드러지고, 위안소가 없는 곳에서 "일했다"는 등 증언이 애매하여 고노 담화의 근거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43]

2013년 12월 2일 자 석간 후지는 고노 자신이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강제 연행)을 뒷받침하는 "종이 증거가 없다"라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44][45]

산케이 신문은 2014년 1월 1일 자 "고노 담화의 기만성, 사실상 한일 '합작' 증언" 기사에서, "근거가 된 한국에서의 전 위안부 16명 청취 조사도 극히 엉성했을 뿐 아니라, 담화 문구에까지 한국 측이 직접 관여한 사실상의 한일 합작이었던 것이 밝혀져 담화의 기만성은 이제 숨길 수 없게 되었다"라고 보도했다.[46] 같은 해 1월 8일 자 기사에서는 "한국 측은 고노 담화나 조사 결과 보고서 작성에 크게 개입하고는, 이후 담화 취지를 확대 해석하여 이용하며 세계에서 일본 비난의 재료로 삼고 있다"라고 보도했다.[47]

2014년 2월 20일, 담화 발표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중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 도서관까지 가서 조사했지만,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모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데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보도 기관 여론 조사에서는 고노 담화 검증에 대한 찬성이 60%를 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48] 같은 달 25일, 일본유신회는 고노 담화 내용 검증 기관 설치를 각 당에 제안했고,[49] 같은 해 4월 18일, 고노 담화 재검토 요구 서명 약 16만 건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에게 전달했다.[50]

같은 해 5월 2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전 위안부 증언을 전부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별개로, (위안부 모집의 강제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상정할 수 있다. 사실은 없다거나 기록은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을 기록에 남길 리가 없다. 자민당 정권이 해 온 것을 자민당 정권이 파헤친 끝에, '그런 사실은 없었다'라고 말하고 문제를 삼고 있다.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고노 담화 검증을 실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51]

같은 해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해 단키 게이이치, 아키즈키 히로코, 아리마 마키코, 고노 마리코, 하타 이쿠히코 5명으로 구성된 검토 팀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경위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52]

제1차 아베 내각 발족 직후인 2006년 10월 5일, 아베 신조 총리는 고노 담화를 "내 내각에서 변경할 사항이 아니다"라며 계승 의사를 밝혔지만, 시모무라 하쿠분 내각관방 부장관은 "고노 담화는 좀 더 사실 관계를 잘 연구해서 그 결과가 어떠한지 시간을 들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수집해서 생각해야 한다"며 추가 해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밝혔다.[64]

아베는 2007년 3월 5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오가와 도시오의 고노 담화 관련 질문에 "기본적으로 계승해 나가겠다"면서도, "좁은 의미에서의 강제성에 대해 말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은 없었다", "관헌이 집에 들이닥쳐 사람을 납치하듯 데려가는, 그런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했다.[65]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 연행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묘사는 보이지 않았다"는 정부 답변서를 각의 결정했다.[66]

자유민주당 부총재 야마자키 다쿠는 "종군 위안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좁은 의미인가 넓은 의미인가 하는 변명과 같은 태도는 취해야 할 것이 아니다"라며 아베를 비판했다. 고노 전 장관은 아시아 여성 기금 인터뷰에서 위안부 모집에 군 정부가 직접 관여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은 점을 근거로 "따라서 종군 위안부가 없었다는 논의를 하는 것은 지적으로 성실하지 않다"고 했다. 정부 가담을 인정하는 가운데 위안부 면담 결과를 이유로 "분명히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상황 설명이 잇따라 나온다"고 회고하며, 관헌이 위안부 모집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고 인정한 점에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67]

아사히 신문 사설에서는 증거가 없다는 발언이 해외에서 일본의 책임 회피로 받아들여져, 워싱턴 포스트가 "납치로 국제적 지원을 구하려면, 일본이 저지른 죄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68]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아베 총리는, 그 부끄러운 행위가 민간의 영리 활동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민당 내 우파에 어필하는 것만큼, 일본의 국제적인 명성을 회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진실을 왜곡하는 그러한 노력은 일본의 명예를 잃을 뿐"이라고 비판했다.[69]

산케이 신문사설 "주장"에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미일 관계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위안소 설치에 '군의 관여'가 있었다고 인정한 때문에, 위안부가 일본군의 '성의 노예'였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렸다"고 고노 담화를 비난했고, 아베의 참의원 답변에 대해서는 "사실에 성실하게 마주한 결과"라고 평가했다.[70] 아베 발언에 대한 미국 측 보도에 대해서는 "중국 친화적인 '뉴욕 타임스' 등이 총리 발언을 왜곡하여 보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70]

4월 17일, 방미를 앞두고 미국 뉴스위크월스트리트 저널 취재에 응하여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동정한다. 총리로서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다시 사죄한 뒤 "그녀들이 위안부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에 대해, 우리는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일본 측 책임 인식을 나타냈다.[71]

2007년 4월 말 CNN 인터뷰에서 아베는 위안부에 대해 "인간으로서, 일본 총리로서 과거에 정말 고생을 경험한 위안부 분들에게 진심으로 동정한다. 20세기는 수많은 인권 침해가 행해진 시대였고, 일본도 무관하지 않았다. 위안부 분들에게 사죄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21세기는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 나도 일본도 적절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베 아키에는 "여성으로서 위안부 분들에게 동정한다.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말했고, 아베의 강제 연행 증거는 없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그의 발언을 듣지 못해서 모르겠다. 그러나, 제 이해로는 그는 그러한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 죄송하다고 계속 말하고 있다"고 말했다.[72]

아베 신조는 1차 집권 당시인 2007년 3월, 담화 전제가 되는 사실 관계에 대해 재조사를 실시할 의향을 표명했고, 역사학자 등 유식자 기관에 재조사를 위임하는 안 등이 거론되었다.[75]

아베는 고노 담화 재검토를 주장했지만, 2012년 12월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자민당 공약에는 고노 담화 관련 기재가 없다. 아베 총리 취임 후에는 "관방장관이 판단해야 할 일"이라며, 2013년 5월 내각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는 고노 담화 재검토를 부정했다.[76] 2013년 5월 7일, 제2차 아베 내각은 일본 공산당 시이 토모코의 "도쿄 재판 관계 문서(국립 공문서관) 속에 강제 연행 증거 서류가 남아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고, 전쟁 범죄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질문주의서[77]에 대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로운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은 있다"는 답변서를 각의 결정했다.[76] 2014년 3월 14일,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를 재검토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한국 정부는 이 대응을 평가했다.[78]

2014년 2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담화 근거가 된 전 위안부 증언 내용을 검증할 의향을 보였고,[79] 같은 해 4월, 정부는 유식자 검증팀을 설치해 같은 해 6월 22일까지 검증 결과를 정리했다고 밝혔다.[80]

2014년 3월 14일, 일본 공산당 시이 카즈오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고노 담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역사의 위조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과 성적 폭행 피해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고노 담화는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자세를 고치고 진실을 인정하며 피해자 배상과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1]

일본 정부는 2014년 6월 20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부터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 교도 통신 보도에 따르면, 보고서에는 담화 작성 시 한일 양국 간 문구를 조정한 경위가 명기되었고, 전 위안부 증언에 관한 뒷받침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82] 하지만 실제 보고서에서는 면담 조사는 일본 정부의 진지한 자세를 보이기 위해 실시되었고, 실제로는 면담 조사 전부터 관계 성청이나 미국 국립공문서관 관련 문서 조사, 군 관계자나 위안소 경영자 등 증언과 면담 조사, 정대협 증언집 분석 등 일련의 조사를 통해 이미 결과가 결정되었고, 담화 원안은 면담 조사 종료 전에 작성되었다고 보고되었다.[52]

이케다 노부오는 2007년 5월 1일, 자신의 블로그에서 "고노 담화의 근거가 된 것은... '나의 전쟁 범죄'(三一書房)라는 책이지만, 이 내용은 날조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고 언급했다.[93]

6. 3. 검증 결과

1992년 7월,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은 위안소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 조사를 약속했다."[32]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물질적인 보상은 요구하지 않는 방침이다"라고 명언했다.[33]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 정부는 금전적 지원은 독자적으로 할 것이므로 일본은 강제 연행을 인정하면 된다는 자세가 선명해졌다", "정부는 강제 연행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는 사태의 타개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라고 보도했지만,[34] 고노 요헤이는 이를 "밀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부정했다.[35]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문서로 강제를 입증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라면서도 "분명히 그녀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진실을 말했다"고 하며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가 있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떤 의미에서도 일본 정부의 지휘 명령 계통 아래 강제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36]

일본 정부가 실시한 고노 담화 작성 과정 검증에서도, 한국 측의 문언 조정 요구에 대해 내각 외정 심의실과 외무성이 협의하면서 "그때까지 실시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사실 관계를 왜곡하는 일이 없는 범위에서, 한국 정부의 의향·요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부"했으며, 한국 측이 요구한 "군의 지시" 등의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37] 산케이 신문 기자 아비루 루이는 "세계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제 연행을 인정했다고 오해하게 되어 기정사실화해 버렸다", "사실 판단이 아니라 정치 판단이었다"라고 비판했다.[38][39]

일본 정부 조사에서는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했다"는 공문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34] 고노는 "조직으로서 강제 연행을 했어도, 억지로라도 데려오라는 명령서나 억지로 데려왔다는 보고서는 작성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보이며, 강제를 인정한 근거로 "모집·이송·관리 등의 과정 전체를 보고, 자유 행동의 제한이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40] 일본 정책 연구 센터에 따르면, 고노는 담화 발표 후 기자 클럽에서 "'관헌 등이 직접 여기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것은 하쿠바 사건을 가리키며, 하쿠바 사건 이외에는 관헌 등이 직접 가담한 사실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 전 위안부와의 청취 조사에서는 위안부 증언을 기록했을 뿐, 사실 관계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41] 청취 자료는 현재도 비공개이다.[41]

한국에서는 안병직 서울대학교 교수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전 위안부로 지목된 여성들에게 청취 조사를 실시, "증언자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경우는 조사를 중단한다"는 원칙에 따라 전 위안부 증언의 절반을 기각했다.[41] 일부 위안부를 제외하고 전 위안부가 강제 연행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41] 전 위안부 증언에는 위안소가 아닌 민간 매춘 시설이 있던 도야마현부산에 연행되었다는 내용도 있다.[41][42]

2013년 10월 16일 산케이 신문은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의 근거가 된 한국에서의 전 위안부 16명 청취 조사 보고서를 입수, 증언의 사실 관계가 모호하고 다른 기회에서의 발언과 불일치가 눈에 띄며, 성명이나 출생년도조차 부정확한 예도 있어 역사 자료로 통용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 연행을 나타내는 정부 자료는 일절 발견되지 않았고, 결정적인 전 위안부에 대한 청취 조사도 엉성했던 것으로 밝혀져 고노 담화의 정당성은 근본에서 무너졌다"고 보도했다. 전 위안부 보고서 자체가 엉성한 조사가 두드러지고, 위안소가 없는 곳에서 "일했다"는 등 증언이 애매하여 고노 담화의 근거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43]

2013년 12월 2일 석간 후지는 고노 자신이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강제 연행)을 뒷받침하는 "종이 증거가 없다"라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44][45]

2014년 1월 1일 산케이 신문은 "고노 담화의 기만성, 사실상 한일 '합작' 증언" 기사에서, "근거가 된 한국에서의 전 위안부 16명에 대한 청취 조사는 극히 엉성했고, 담화 문안에까지 한국 측이 직접 관여한 사실상의 한일 합작이었던 것이 밝혀져 담화의 기만성은 이제 숨길 수 없게 되었다"고 보도했다.[46] 같은 해 1월 8일 기사에서는 "한국 측은 고노 담화나 조사 결과 보고서 작성에 크게 개입해 놓고, 그 후에는 담화의 취지를 확대 해석하여 이용하며, 세계에서 일본 비난의 재료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47]

2014년 2월 20일, 담화 발표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중원예산위원회에서 "미국 도서관까지 가서 조사했지만,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모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데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보도 기관 여론 조사에서는 고노 담화 검증에 대한 찬성이 6할을 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48] 2월 25일 일본유신회는 고노 담화 내용 검증 기관 설치를 각 당에 제안했고,[49] 4월 18일 고노 담화 재검토 요구 약 16만 서명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에게 전달했다.[50]

2014년 5월 2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전 위안부 증언을 전부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별개로, (위안부 모집의 강제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상정할 수 있다. 사실은 없다거나 기록은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을 기록에 남길 리가 없다. 자민당정권이 해 온 것을 자민당 정권이 파헤친 끝에, '그런 사실은 없었다'라고 말하고 문제를 삼고 있다.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고노 담화 검증을 부정했다.[51]

2014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해 단키 게이이치, 아키즈키 히로코, 아리마 마키코, 고노 마리코, 하타 이쿠히코 5명으로 구성된 검토 팀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경위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52]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 관련 한일 간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부터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 교도 통신 보도에 따르면, 보고서에는 담화 작성 시 한일 양국 간 문구 조정 경위가 명기되었고, 전 위안부 증언에 관한 뒷받침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82] 그러나 실제 보고서에서는 면담 조사는 일본 정부의 진지한 자세를 보이기 위해 실시되었고, 실제로는 면담 조사 이전에 관계 성청, 미국 국립 공문서관 관련 문서 조사, 군 관계자나 위안소 경영자 등 증언과 면담 조사, 정대협 증언집 분석 등 조사를 통해 이미 결과가 결정되었고, 담화 원안은 면담 조사 종료 전에 작성되었다고 보고되었다.[52]

6. 4. 검증에 대한 비판

고노 담화는 일본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일본 내 보수 세력은 담화의 내용과 검증 과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2007년, 아베 신조 당시 총리는 여성들이 군 위안소에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발언했다.[65] 고노 담화 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이시하라 노부오 전 내각관방부장관은 일본 국회에 출석하여, 조사 과정에서 인터뷰한 여성 16명의 진술을 뒷받침할 만한 문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36]

2013년 10월 16일산케이 신문은 고노 담화의 근거가 된 전 위안부 16명의 증언이 사실 관계가 모호하고 다른 기회에서의 발언과 불일치하며, 역사 자료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보도했다.[43] 2013년 12월 2일자 석간 후지는 고노 요헤이 자신이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뒷받침하는 "종이 증거가 없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44][45]

2014년 2월 20일, 담화 발표 당시 내각 관방 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도서관까지 가서 조사했지만,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모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데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48]

자민당 의원들은 담화 수정을 검토하기 위한 모임을 결성했으며, 2014년에는 한국 정부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79] 2014년 6월 20일, 하타 이쿠히코를 포함한 5명은 고노 담화와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교류의 세부 사항 - 고노 담화의 초안부터 아시아여성기금까지 -''라는 보고서를 검토하여 국회에 제출했다.[17] 이 보고서는 요시다 세이지의 고백에 나타난 기술의 불일치를 지적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산케이 신문2014년 1월 1일자 기사에서 고노 담화의 근거가 된 전 위안부 16명에 대한 청취 조사가 극히 엉성했을 뿐 아니라, 담화 문안에 한국 측이 직접 관여한 사실상의 한일 합작이었다고 보도했다.[46]

일본 정부2014년 6월 20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교섭 경위~고노 담화 작성부터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를 공표했다.[52] 보고서에는 담화 작성 시 한일 양국 간에 문구를 조정한 경위가 명기되었고, 전 위안부 증언에 관한 뒷받침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82]

제1차 아베 내각 발족 직후인 2006년 10월 5일, 시모무라 하쿠분 내각관방 부장관은 "고노 담화는 좀 더 사실 관계를 잘 연구해서 그 결과가 어떠한지 시간을 들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수집해서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라며 사실 관계에 대한 추가적인 해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밝혔다.[64]

2007년 3월 5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신조는 "좁은 의미에서의 강제성에 대해 말하면,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없었다", "관헌이 집에 들이닥쳐 사람을 납치하듯 데려가는, 그런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했다.[65]

이에 대해 야마자키 다쿠 전 자유민주당 부총재는 "종군 위안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좁은 의미인가 넓은 의미인가 하는 변명과 같은 태도는 취해야 할 것이 아니다"라며 아베를 비판했다.[67]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아베 총리는, 그 부끄러운 행위가 민간의 영리 활동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민당 내 우파에 어필하는 것만큼, 일본의 국제적인 명성을 회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진실을 왜곡하는 그러한 노력은 일본의 명예를 잃을 뿐"이라고 비판했다.[69]

2014년 3월 14일, 일본 공산당의 시이 카즈오 위원장은 "고노 담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역사의 위조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81]

이케다 노부오는 2007년 5월 1일, 자신의 블로그에서 "고노 담화의 근거가 된 것은... '나의 전쟁 범죄'(三一書房)라는 책이지만, 이 내용은 날조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고 언급했다.[93]

7. 고노 담화 이후 일본 역대 내각의 대응

고노 담화는 1993년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중요한 성명이었다. 이후 일본 역대 내각은 이 담화를 계승하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

; 호소카와 내각

1993년 9월, 호소카와 내각은 무라야마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과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발언을 통해 고노 담화를 계승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62]

; 하타 내각

1994년 6월, 하타 쓰토무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하며, 위안부 문제를 인도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무라야마 내각

1994년 7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소신 표명 연설에서 과거 일본의 침략 행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한 깊은 반성을 표명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하시모토 내각

1996년 5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위안부 문제를 "불행한 역사"로 규정하고,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위문 및 사과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며, 고노 담화에 담긴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오부치 내각

1998년 8월,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고노 담화를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으로 재확인했다.

; 모리 내각

2000년 9월, 모리 요시로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하고, 위안부 문제를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한 문제로 인식한다고 밝혔다.

; 고이즈미 내각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최대한의 협력을 표명하고, 후쿠다 야스오 내각관방장관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혔다.

; 제1차 아베 내각

아베 신조 총리는 2006년 10월 고노 담화를 변경하지 않겠다고 명언했다.[62] 그러나 2007년 3월, 아베 총리는 "좁은 의미의 강제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없었다고 발언하며 논란을 일으켰다.[65] 이러한 발언은 국내외에서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미국 언론은 일본의 책임 회피를 지적했다.[68][69] 아베 총리는 이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하고 일본 측의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지만,[71] 강제 연행 증거가 없다는 주장은 계속되었다.[66]

; 후쿠다 야스오 내각

2007년 11월, 후쿠다 야스오 내각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표명했다.[63]

; 아소 내각

2008년 10월, 아소 다로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혔다.

;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2010년 5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표명했다.

; 노다 내각

2012년 8월,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 후지무라 오사무 내각관방장관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혔다.

; 제2차 아베 내각

2014년 3월, 아베 신조 총리는 고노 담화를 재검토하지 않겠다고 표명했다.[78] 그러나 같은 해 6월,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한 검증 작업 보고가 발표되었고,[30] 이 보고서에는 담화 작성 시 한일 양국 간의 문구 조정 경위와 전 위안부 증언에 대한 뒷받침 조사가 미흡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82]

; 스가 요시히데 내각

2021년 4월,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표명했다. 다만, '종군위안부'라는 용어 대신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혔다.

8. 고노 담화의 의의와 영향

고노 담화는 1993년 일본 제국 육군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위안부로 알려진 여성들을 군용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도록 강요했음을 인정한 내각관방장관 고노 요헤이의 성명이다. 일본 정부는 이전까지 여성들이 강요받았다는 것을 부정해왔다.

고노 담화에서 일본은 구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매춘소 설치에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위안부는 주로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의 감언, 강제 등에 의해, 때로는 관리나 군인을 통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되었고, 위안소의 강압적인 환경 아래 비참하게 살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징집이 주로 민간 모집 업체에 의해 시행됐다고 보기 때문에, 성명에서 강요가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직접 여성들의 모집과 유지에 사용된 것을 인정했는지 아닌지는 논의되고 있다.

고노 담화는 일본에서 몇몇 보수파들의 비판 대상이었다. 2007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여성들이 군 위안소에 종사하도록 강요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고노 담화 초안 작성 당시 내각관방부장관 이시하라 노부오는 일본 국회에 선서되지 않은 증언에서 조사 과정 동안 인터뷰한 여성 16명의 진술을 증명하는 어떤 문서 기록도 발견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14년 하타 이쿠히코와 4명은 의회 제출을 위해 고노 담화와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교류의 세부 사항 - 고노 담화의 초안부터 아시아여성기금까지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검토했다. 자민당 의원들은 담화 수정을 조사하면서 아베가 주도하는 정부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었다. 2014년 검토는 한국 정부에 의해 비판받았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화춘잉은 "일본 정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있었다"고 말했으며, 한국은 정식 항의를 제기하기 위해 일본 대사를 소환했다.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 증언을 기반으로 쓰여진 과거 기사의 오류를 인정했지만, 강제적인 성 노예가 인신매매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핵심적 사실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아베 신조 총리 또한 고노 담화를 수정할 계획이 없다고 재확인했다.

8. 1. 위안부 문제 해결의 기준점

고노 담화는 1993년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한 공식 담화이다. 이 담화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의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58]

고노 담화 발표 이후,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평화 우호 교류 계획" 담화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했다.[59] 1995년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 발족되어 전 위안부에 대한 보상 사업을 진행하는 등, 고노 담화는 일본 정부의 후속 조치로 이어졌다.

그러나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일 비난 결의안을 제출한 마이크 혼다 의원은 "고노 담화에서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등[60], 담화 내용에 대한 곡해도 있었다.

2012년에는 국민의 생활이 제일 소속 토야마 키요시 의원이 "증거도 없는데, 이 고노 담화를 노다 내각은 답습하는가"라고 비판하며, 고노 요헤이의 참고인 소환을 요구하기도 했다.[73] 이는 고노 담화에 대한 일본 내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8. 2. 한일 관계에 미친 영향

고노 담화는 한국에서 대체로 환영받았다. 이 담화는 전쟁 중 강제로 매춘에 종사해야 했던 여성들에게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는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으로 이어졌다.[59] 1994년 8월 31일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총리대신이 "평화 우호 교류 계획"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며 "이른바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하고, 평화 우호 교류 계획의 실시를 표명했다.[59] 1995년 7월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 발족하여, 전 위안부에 대한 보상 사업을 실시했다. 그 후, 역대 일본 총리들은 한국에 대해 사죄를 표명해 왔다.

그러나 담화 발표 당시 "보상은 불필요"라고 했던 한국 측은 직접적인 청구는 하지 않았지만, 전 위안부가 제기하는 배상 소송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61] 또한, 현재는 한국 국회의원들이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2014년 고노 담화 검토는 한국 정부의 비판을 받았다.[61] 중국 외교부 대변인 화춘잉은 "일본 정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있었다"고 말했으며, 한국은 정식 항의를 위해 일본 대사를 소환했다.

8. 3.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

고노 담화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문서로, 국제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한국의 환영과 후속 조치:
  • 한국은 고노 담화를 환영했다.[58]
  • 담화에 기초하여 학교 역사 교과서에 강제 매춘부(위안부) 주제를 기술하게 되었다.
  • 전쟁 중 강제로 매춘을 해야 했던 여성들에게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는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을 이끌었다.[59]
  • 1994년 8월 31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총리대신은 "「평화 우호 교류 계획」에 관한 무라야마 내각총리대신의 담화"에서 "이른바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하고, 평화 우호 교류 계획의 실시를 표명했다.
  • 19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 발족하여 전 "위안부"에 대한 보상 사업을 진행했다.
  • 역대 총리들은 한국에 대해 사죄를 표명했다.
  • 국제사회의 인식 확산:
  • 일본 정부가 군에 의한 강제 연행을 인정했다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확산되었다.[58]
  •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일 비난 결의안을 제출한 마이크 혼다 의원은 강제 연행의 근거 중 하나로 고노 담화를 언급했다.[60]
  • 한국의 입장 변화:
  • 당초 "보상은 불필요"라고 했던 한국 측은 전 위안부가 제기하는 배상 소송에 대해 간접적인 지원을 시작했다.[61]
  • 현재는 국회의원이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에 대한 사죄·배상을 요구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 일본 내 논쟁:
  • 일본 내에서는 고노 담화에 대한 비판과 수정 요구가 존재한다.
  • 2014년 하타 이쿠히코와 4명은 의회 제출을 위해 고노 담화와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교류의 세부 사항 - 고노 담화의 초안부터 아시아여성기금까지 -''명명된 보고서를 검토했다.
  • 자민당 의원들은 담화의 수정을 조사하거나, 고노 요헤이의 참고인 소환을 요구하기도 했다.[73][74]
  •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 증언을 기반으로 쓰여진 과거 기사의 오류를 인정했지만, 강제적인 성 노예가 인신매매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핵심적 사실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 국제사회의 반응:
  • 2014년 고노 담화 검토에 대해 중국은 "일본 정부의 잘못된 행동에 대대 논란에 여지가 없는 증거가 있었다"고 비판했고 한국은 정식 항의를 제기하기 위해 일본 대사를 소환했다.

9. 한국의 입장과 과제

노다 내각 시절부터 고노 요헤이의 참고인 소환 요구가 있었다. 2012년 8월, 국민의 생활이 제일 소속 토야마 키요시(후에 희망의 당에 참가, 현재는 무소속)는 "고노 담화가 역사를 왜곡하고, 오늘날의 한일 관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라고 주장하며, "증거도 없는데, 이 고노 담화를 노다 내각은 답습하는가"라고 비판했다. 또한, "한국 측의 종군 위안부라고 불리는 분들의 증언만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이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담화 내용 중 '감언, 강압 등에 의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아진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 나아가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음이 밝혀졌다'라는 문구가 강제 연행을 시사한다며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노 요헤이의 참고인 소환을 요구했다.[73] 이에 대해 예산위원장은 "나중에 이사회에서 협의하겠습니다"라고 답변했고, 이사회에서 같은 당의 모리 유코(현 국민민주당)가 다시 참고인 소환을 주장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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